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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부정공>위당처사휘장섭묘갈명(韋堂處士諱章燮墓碣銘)
韋堂處士諱章燮墓碣銘 韋堂先生趙公觀化之三十有九年壬子其後孫等將竪羡門六刻于谷城月峰先山壬坐之阡等三孫東燦奉柳公泳所撰狀遠來請銘不侫辭不獲命乃按而序文曰公諱章燮字成汝韋堂號而文以潛溪系出玉川而高麗檢校大將軍璋爲肇祖三傳玉川府院君忠獻公元吉號農隱與圃牧陶治並稱五隱副正正虔谷瑜蔭察訪智崙贈佐郎梅窓大成進士蓮潭怡贈童蒙敎官竹軒徑爲顯祖高祖깈曾祖宗㵂號筍塢祖洙號默軒考諱昌灌號梧下文學行義世趾厥羡美妣海州吳氏外祖仁常公次哲宗丁巳生形端氣和才又款拔一覽輒誦綐成童己淹貫經史始以親命業功命旋即廢乃從事爲己之學臨履軒申公是當世名士而公爲外甥因受薰陶進學文路脉實權輿於此後聞淵齋宋先生承文正之學講道于遠溪乃贄謁定事一之禮先生見其論文講義大加獎詡即賜號韋堂以勗之公心悅誠服其於天人性命之奧陰陽淑匿心之分華夷人獸之辨靡不講質昭晰自是盡委家務於夫人專意講學始居朝陽窩晚年移于養梧軒四方之聞風請業者坌集公卦牌秉拂委曲開導後進之成就者多其爲學也謂道在日用理備方寸求道如飢渴窮理忘寝食深歎道術分裂氣説橫릌而至有性師心弟之説乃著明理説性性師心弟辨以駁之農山申氏有天有人心私惡之説又遂條辨駁至累百言其内行之篤則孝奉二親養軆養志務極其備自分家距大宅稍遠而雖風晨兩夕定省無或有闕或出外所聞見二歸告從容母夫人因一女之爲寡而憂愁幾生疾公爲慰其心侍奉於家至十八年居大人公憂執禮甚嚴毀瘠骨立幾至滅性母夫人慮之將終特遣命勿復然治家有條理家人雖一言一動不敢肆行或有祀過招而責之如古萬石君每晨必聞鷄即起整摂衣冠危坐誦書以達朝持身以敬爲主動靜云爲之間威儀嚴肅言辭正直其處義之嚴則朝廷斷髮之令公奮然以頭可斷髮不可斷書告同志友有衣制變革之令公以寧受戮辱義不可着此者誓高宗賓天人有不服之説者公擧義斥之會門生行望哭禮一族叔憂家賓欲染指新學公賂書諷諫辭氣禀期抵感悟一同門人入其孫於新校公亦貽書責之彼終不聽乃漸踈濶自順天有刊譜之議公以得彼讎政認可嚴禁之凡於義理關頭論議峻載眼彩射人有賁育莫奪之氣삹是以自世燮以後益靡堪牢騷벸慨其發於吟味書牘之間者無非尊攘扶抑強難之義而有功於勵俗補敎隱然可以謂不尠矣勉菴先生之賀以屹屹任道松沙先生之贊以獨立赤熾其見推於國内碩德可知美配平山申氏命熙女壺範克備多内助生三子男敏植女適文化柳鎭泳南原尹在憲孫東璉東璿東璨東球東琳女適光山金斗錫外孫柳根弼根玉尹相鎬餘不錄銘曰早遊名門授受端的發朝以正何岐惑克知吾學的在爲己耻與俗儒共務口耳道在日用踐之是篤亟養純粹操守敦確負抱之崇造詣之卓世不我知空老林樊惟是遺文扶道格言印布爛然嘉惠後學庸銘于珉戒爾樵牧 壬子八月下澣 安東 權昌鉉 撰 族孫 光萬 謹書 위당처사휘장섭묘갈명(韋堂處士諱章燮墓碣銘) 위당선생(韋堂先生) 조공(趙公)이 돌아가신지 三十九년되는 임자(壬子)에 그 후손들이 장차 순천(順天) 곡성(谷城) 월봉(月峰) 先山 임좌(壬坐)에 있는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셋째 손자 동찬(東燦)이 유영 공(公)이 지은 행장을 받들고 멀리 찾아와서 묘갈명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사양하다가 되지 않아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의 휘는 장섭(章燮)이요 자는 성여(成汝), 호는 위당(韋堂) 또는 잠계(潛溪)이시다. 옥천조씨로 고려검교대장군(高麗檢校大將軍) 휘 장(璋)을 시조로 하며, 三대를 내려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충헌공(忠獻公) 휘 원길(元吉)은 호가 농은(農隱)이신데 포은(與圃)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 등과 오은(五隱)으로 일컬어지셨다. 부정(副正) 건곡(虔谷) 유(瑜)의 음보(蔭察:조상의왕덕으로벼슬에임명되는이)로 찰방(察訪) 지륜(智崙) 좌랑(佐郎)에 추증되고 호가 매창(梅窓)인 대성(大成), 진사(進士)로 호가 연담(蓮潭)인 이(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된 호가 죽헌(竹軒)인 경(俓)이 현조(顯祖)이며, 고조는 급(汲), 증조는 호가 순오(筍塢)인 종렴(宗濂), 할아버지는 호가 묵헌(默軒)인 수(洙), 아버지는 호가 오하(梧下)인 창관(昌灌)인데 문학과 행의(行義)로 세상에 알려지셨으며 어머니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아버지는 오인상(吳仁常)이다. 공은 철종(哲宗) 정사년에 출생하셨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온화하셨으며 재주가 영민하여 글을 한번 보면 모두 외웠다. 아이 때부터 경사(經史)를 관철하였는데 처음에는 부모님의 명으로 과거(科擧) 시험공부를 하다가 곧 그만두고 자기수양(自己修養)을 하는 학문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명사인 임헌(臨軒) 신(申)공에게 가서 글을 배웠는데, 공은 바로 신공의 외생(外甥)이다. 여기에서 학문하는 방법을 배워 공의 학문의 시초는 바로 이에 근본하며, 그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선생이 정통의 학문을 계승하여 원계(遠溪)에서 도학(道學)을 강론하고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는 찾아뵙고 제자(弟子)의 예(禮)를 올렸다. 송선생께서 논문(論文)을 보시고는 크게 장려하면서 그 자리에서 위당(韋堂)이란 호를 지어 주시자 공은 매우 기쁘게 따르셨다. 이에 하늘과 사람의 깊숙한 관계, 음양(陰陽)의 좋고 나쁜 구분, 중화(中華)와 오랑캐, 사람과 금수(禽獸)의 구분 등을 배워 환하게 깨우치게 되셨다. 이때부터 집안일을 모두 부인에게 맡기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조양와(朝陽窩)에서 거처하다가 만년에는 양오헌(養梧軒)에서 거처하다가 만년에는 양오헌(養梧軒)으로 옮기셨는데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은 성의를 다하여 학문을 가르쳐 성취(成就)된 후진(後進)이 매우 많았다. 공은 학문에 대해 말씀하기를, 도(道)란 일용(日用)하는 가운데에 있고, 이치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만일 목이 마를때 물을 찾듯 구하고 침식을 잊고 궁리(窮理)하면 되지 않을리가 없다고 하셨다. 공은 도술(道術)이 분영되어 서로를 공격한 것을 깊이 탄식하였는데 심지어 성(性)은 스승이요 심(心)은 동생이라는 학설까지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공은 명리설(明理説)과 성사심제변(性師心弟辨)이란 책을 지어 반박하였다. 농산(農山) 신득구(申得求)가 천유인심사악설(天有人心私惡說)을 짓자 공은 또 조목조목 따져서 논박하였다. 공의 행실이 돈독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 음식 봉양을 정성껏 하여 갖추지 않음이 없으셨다. 분가(分家)한 이후로는 큰집과 거리가 멀었는데도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무릅쓰고 아침 저녁 문안을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외출했다가 돌아와서는 들은 소문을 하나하나 다 말씀드렸다. 모부인께서 딸 하나가 과부(寡婦)가 되자 병환이 나셨는데 공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며 집에서 十八년을 모셨다. 아버지 상(喪)을 당해서는 상례(喪禮)를 매우 엄격하게 지켜 몸을 상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모부인께서 죽을까 염려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타이르기까지 하셨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조리(條理)가 있어서 집안 식구들이 말 한마디나 행실 하나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였으며, 혹 잘못을 저지르면 불러다가 꾸짓기를 마치 한(漢)나라 때 만석군(萬石君)이란 사람처럼 하였다. 매일 새벽에 닭이 울면 즉시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책을 읽으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몸가짐은 경(敬)을 위주로 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모습이 엄숙하였으며 말씀이 정직하셨다. 처신을 의롭게 하여 나라에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공은 분연히 말씀하기를, 내목은 자를지언정 내 머리털은 자르지 못한다고 하면서 글로 써서 동지들에게 이런 뜻을 알렸다. 또 조정에서 복장(服裝)의 제도를 변경하자 공은 죽을지언정 이런 옷은 입지 못하겠다고 맹세 하셨다. 고종황제(高宗皇帝)께서 승하(昇遐)하자 복(服)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자 이를 배척하면서 문생(門生)들을 불러 모아놓고 대궐(大闕)이 있는 쪽을 향하여 예(禮)를 올렸다. 한 족숙(族叔)이 가난한 것을 염려한 나머지 신학문(新學門)을 배우려고 하자 공은 편지를 보내 말렸는데, 그 글의 뜻이 매우 엄격하여 깨닫도록 하였다. 한 동네에 사는 일가가 그 손자를 신학교(神學校)에 입학시키자 공은 역시 글을 보내 꾸짖었으며, 그 사람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이에 점점 멀리하셨다. 순천(順天)에서 족보(族譜)를 만들자는 의논이 있자 공은 왜인(倭人)의 총독부(總督府)의 인가(認可)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셨다. 이처럼 의리를 지키는 논의가 엄준하여 눈이 빛을 내고 그 기개는 옛날 힘이 장사였던 분육(賁育)이라도 빼앗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왜정(倭政)이 시작된 이후부터 더욱 강개(慷慨)하여 그 시문(詩文)이나 편지에 나타난 것도 모두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부호(扶護)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풍속을 격려하고 바로잡은 공이 적지 않았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께서는 우뚝하게 도(道)를 지킨다고 칭찬하셨으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선생은 혼자서 깃발을 우뚝하게 드셨다고 감탄하였으니, 국내에서 추중(推重)을 받은 것을 알 수가 있다. 배위(配位)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명희(命熙)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어 내조(内助)가 많았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민식(敏植)이요, 딸은 문화인(文化人) 유진영(柳鎭泳), 남원인(南原人) 윤재헌(尹在憲)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동연(東璉), 동선(東璿), 동찬(東璨), 동구(東球), 동림(東琳)이며 손녀는 광산인(光山人) 김두석(金斗錫)에게 출가하였으며 외손은 유근필(柳根弼) 유근옥(柳根玉) 윤상호(尹相鎬)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일찍부터 훌륭한 스승에게 배워 바른 학문 배우셨네 早遊名門 授受端的 배운 것이 바른데 어찌 잘못된 논의에 미혹되랴 發明以正 何岐惑克 우리 학문의 목표 알아서 자기 수양에 힘쓰시고 知吾學的 在爲己任 속된 선비들처럼 실속 없는 공부함을 부끄럽게 여겼네 耻與俗儒 共務口耳 도는 날마다 쓰는 가운데 있어 실천을 돈독히 하였네 道在日用 踐之是篤 순수하게 자신 수양하고 확실하게 도를 지켰네 亟養純粹 操存敦確 크나큰 포부 지니시고 학문의 조예 탁월하였네 負抱之崇 造詣之卓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헛되이 초야에서 늙었네 世不我知 空老林樊 오직 글을 남겨 도를 지키는 격언이 되었네 惟是遺文 扶道格言 그 문집 간행하여 후학들에게 은혜 베풀었네 印布爛然 嘉惠後學 이에 비석에 글 새겨 너희 나무하는 사람 경계하네 庸銘于珉 戒爾樵牧 안동(安東) 권창현(權昌鉉) 삼가 지음 족손(族孫) 광만(光萬)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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